• 로그인
  • 회원가입
  • 사이트맵
로그인
전체메뉴
닫기
성경통독회3일차(2021.3.28.주일)
첨부파일 2개

4기 평신도성경대학-백투더베이직(모세오경)과정-세 번째 독서(2021. 3. 28)

 

1.    죄의 역사와 하나님의 부름(4-11):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죄의 전개와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으로서 인간의 회복을 위하여 부르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읽는다.

2.    먼저 가인과 아벨의 사건을 살펴보면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게 된다. 동생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형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다(4:2). 이들은 각각 자신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였다(4:3-5). 그러자 곧 가인은 분하여 그 안색이 변하였다(4:5). 하나님은 어찌하여 나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동생의 것만 받으시는가?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제물을 받고 안 받고는 받는 분에게 속한 일이지, 내가 주었으므로 상대가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선물은 받는 사람이 기쁘게 받을 수 있어야 선물로서 값어치가 있는 것이지, 내 만족을 위해 상대방은 어떻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가인이 분을 낸 것은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반응 때문이 아니라 가인 자신의 잘못된 생각 때문에 일어난 일인 것을 깨닫게 된다.

3.    하나님은 이 문제를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가인의 안색이 변하자 그를 향하여 말씀한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4:6-7). 도대체 어째서 너의 마음이 상하였느냐?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리라. 우리 마음이 악한 사단 마귀의 지배를 받으면 가인과 같은 상태가 된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죄에게 지지 말고 그것을 다스리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가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르고 계셨던 것이다.

4.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동생을 불러내어 그를 죽였다. 하나님이 창조한 생명 그것도 골육지친(骨肉之親)인 동생을 때려 죽이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갈라지고 사람과 갈라지게 된 인생의 현주소를 말해준다.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생명으로서 존중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에 정의가 아니면 죽여도 되는 상대적인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가인은 아벨의 생명을 해함으로써 결국은 자신도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므로 후에 가인은 자신도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호소한다(4:14). 인간은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두려운 존재가 된 것이다.

5.    그러나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가인을 찾았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4:9). 마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숨었을 때 아담아 어디 있느냐?”고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 같다. 하나님이 몰라서 찾았겠는가? 하나님은 가인과 그가 행한 일을 안타까워하시며 그가 돌아설 것을 촉구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 가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날을 세우며 대꾸한다.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4:9). 첫째는 거짓말이요, 둘째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는 분 아닙니까? 동생이 어떻게 된 것을 왜 내게 물으십니까?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 제물도 받으셨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고, 내 마음을 다스리도록 하셨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르고, 내가 죽이려 할 때 막으셨다면 이러한 불상사는 없었지 않았겠습니까? 왜 내게 추궁하십니까? 우리가 범죄하였을 때의 심정이 이와 같지 않을까?

6.    그러자 하나님은 가인의 죄를 지적하고 그가 저주를 받을 것을 말씀한다(4:10-11). 땅을 갈아도 효력이 없고 너는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4:12). 이것은 아담에게 주어진 저주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생이 세계와 더욱 더 소외되게 되었음을 상징한다. 인간의 죄의 역사는 분열과 소외가 점증하는 역사이어 왔다. 후기근대는 그 극단적 현상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예언자들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회개하고 돌이킬 것은 끊임없이 말씀하여 왔건만, 인생에게 그것은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7.    그러므로 그 때야 가인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두려움을 호소한다.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일까 두렵다는 것이다(4:14). 이것이 인생의 생각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이 죄 가운데 사는 인생은 항상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어떠한가? 우리는 바로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인과론적 생각과 얼마나 다른지를 발견하게 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4:15). 하나님의 생각은 사랑이요, 화평이다.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의 보호를 약속하였다. 인간은 피의 보복을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사랑과 용서와 화해이다. 죄는 우리를 분열의 길로 인도하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치유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8.    가인은 하나님 앞을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였다고 했다(4:16). 놋은 유리함, 떠돌아 헤맨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된 것이다. 인생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정처 없는 존재이다. 세상에 마음을 둘 곳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인생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하늘나라가 본향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지 못한 인생은 세상을 떠돌다 아무 의미없이 가는 인생이 된다. 그들이 갈 곳은 영원한 지옥의 형벌뿐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3:18). 당신은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하여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사는 인생인가? 이것이 없다면 당신의 인생은 허무할 뿐이다.

9.    가인이 아내와 동침하여 낳은 아들의 이름은 에녹이었다(4:17). 그런데 그 다음에 가인은 무슨 일을 했는가? 성을 쌓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 했다(4:17). 성은 단절의 상징이다. 자기 스스로를 자신의 힘으로 지키려는 안전의 욕구를 말해준다. 에녹이라는 이름의 뜻은 dedicated라는 뜻으로 무엇엔가 아주 열중하여 몰두해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는 무엇에 몰두해 있는가? 어디에 몰두해 있을 때 희열을 느끼는가? 그것이 자신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인에 대한 보호를 약속했건만, 가인은 여전히 두려웠다. 그리고 성을 쌓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 자신의 아들의 이름과 같이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고자 전전긍긍했던 것이다. 인생이 가인과 같다면 그야말로 불행한 인생이다. 그러나 인생은 어거스틴의 말처럼 하나님 안에 쉼을 얻기까지 그 마음에 평안을 찾지 못하는것이다(어거스틴, 『고백록』 1.1.).

10.  그 후로 죄의 역사는 계속된다. 라멕에 이르러서는 두 아내를 맞았는데, 아다라는 여인을 통해서는 야발을 낳았는데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 아우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다른 여인 씰라를 통해서 얻은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와 여러 기구를 만드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두발가인의 누이의 이름은 나아마였다(4:19-22). 라멕이라는 이름의 뜻은 힘 쎈(powerful)”이라는 뜻이다. 그가 두 아내를 맞은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2:24 참조). 믿음의 조상 야곱은 네 명의 아내를 두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을 그대로 기록하였다. 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죄 된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후 인간의 모든 제도와 삶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고 그로부터 인간은 자신만의 문명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라멕의 아들들이 그것을 상징한다. 인간의 문명은 하나님과 멀어지는 길을 선택하였다. 그것은 죄의 역사였다. 그러나 죄의 삯은 사망이다(6:23). 주님은 죽음에 이르는 질병에 걸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가운데 보낸 것이다.

11.  이후에 라멕이 아내들을 향하여 한 말을 보면, 인류의 죄의 역사는 한층 더 심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말하기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고 하였던 것이다(4:23-24). 산술적으로 보아도 라멕 시대의 죄는 가인의 그것보다 11배는 악화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적인 말이고, 실제로는 인간의 죄상이 그만큼 악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12.  그러나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의 품에서 아벨을 대신하여 새 아들을 주었는데, 그 이름은 셋이었다(4:25). 그 이름의 뜻은 보상(compensation)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위로하셨다. 아벨을 잃은 슬픔을 달래셨다. 자신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가죽 옷을 만들어 입히시던 하나님의 심정이 그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을 사랑하고 그들이 다시 출발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고 했다(고후 5:17). 셋도 아들을 낳고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다(4:26). 에노스는 에녹과 발음이 비슷한데 그 뜻은 사람(man)”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그 때 비로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과 연결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받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인생이 되기를 원하신다.

13.  그러나 기다란 아담의 계보가 기록된 후(5) 나타난 인간의 현실은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게 된 것이었다(6:5).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으므로하나님이 그들의 육신 됨을 한탄하시고 그들의 날을 120년으로 한정하였다고 적고 있다(6:2-3).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통혼 그리고 그들의 육신 됨은 인간의 죄악의 심화를 상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죄의 역사는 멈출 줄 몰랐다. 그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대로 행동하였다. 오늘날 동성애는 무엇을 주장하는가? 자신들이 욕망하는 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그러나 죄 많은 인간이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은 항상 악할 뿐이다(6:5).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오용한 첫 인간, 아담과 하와의 DNA였다. 동성애자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와 인권은 허울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상징, 무지개는 인간의 욕망의 상징이 되었다.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죄악의 민 낯인가! 하나님은 한탄하고 근심하였다(6:6). 그리고 급기야 자신의 형상대로 지은 인간을 모든 가축과 짐승과 더불어 지면에서 쓸어버리기로 작정하기에 이른다(6:7).

14.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고 했다(6:8). 이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 노아는 은혜를 입은자였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다(6:9).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는데(3:10) 이것은 무슨 말인가? 우리는 이것을 노아가 스스로 의인이요 완전한 자였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아담과 하와 이래 모든 인생은 죄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나님이 그를 의인 삼으시고 온전케 하였으며 그와 동행하여 주셨다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이 동행해 주셔야 하는 것이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로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2:20). 하나님은 그를 택하여 들어 쓰시고 구원의 역사를 써 내려가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인간은 여전히 죄의 길로 치 달았으나 하나님은 한 번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새롭게 하고 창조의 축복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여 인간을 부르고 계셨던 것이다.

15.  하나님은 노아를 부르시고 계획을 말씀한다(6:13). 그러므로 너는 이 계획을 실현할 방주를 지으라는 것이다(6:14 이하). 하나님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다.” 방주의 규격과 제작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는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하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라”(16:9).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순종하는 백성이 되면 구원의 복된 삶을 누리게 된다. 노아의 순종은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친다. 순종할 때 역사가 일어나고 구원이 임한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했다(삼상 15:22). 세상의 죄악에 순종하는 자 되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라.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3:10).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생명의 축복을 약속했고,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6:18-22).

16.  하나님은 말씀대로 물로 지면을 쓸어버리셨다. 노아와 가족들과 정한 짐승들은 방주에서 1년여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물이 줄고,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방주에서 나오게 되었다(8:13-19). 방주에서 나온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한다(8:17). 하나님은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도 복을 주시며 이르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였다(9:1). 창조 본연의 축복의 회복,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위하여 지금도 우리를 부르신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이다. 방주에서 나와 하늘을 향하여 제단을 쌓은 노아와 세계를 향하여 하나님이 다짐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라(8:21-22).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사무치는가! 우리는 그의 사랑을 생각할 때에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다.

17.  9:3절에 이르러 동물의 취식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고기는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을 말씀한다(9:4). 왜냐하면 피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생명 존중의 뜻을 살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식문화는 어떠한가? 생존을 너머 쾌락을 위하여 생명을 취하고, 더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생명마저(9:6 참조) 자신의 유익과 쾌락을 위하여 해하기를 주저하지 아니하는 악한 문화 속에 젖어 살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인간의 죄된 실상이다. 하나님의 뜻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다(9:7).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리라”(4:7). 우리는 어떻게 하면 생명을 살리는 문화를 회복할 것인가? 공존공영(共存共榮)의 문화를 만들 것인가? 그 답은 오직 예수 밖에 없다.

18.  10장에는 노아의 족보가 기록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희망의 계보가 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 바로 나오는 바벨의 이야기는 이러한 희망과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졌음을 말해 준다. 그런데 이러한 죄의 실상은 9:18-27절 사이에 짤막하게 삽입된 노아와 그의 아들들 사이의 일화에서 벌써 시작되었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고 잠들었는데, 이것을 세 아들 중에 한 명이었던 함이 보고 그 형제들에게 고하였고 셈과 야벳은 이 소식을 듣고 돌아와 뒷걸음질하여 그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다는 것이다(9:20-23). 노아가 술에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행한 일을 듣고 그를 저주한다(9:23-25). 반면에 그의 두 형제는 축복(?)하였다(9:26-27). 이것은 물론 오늘날 많은 주석가들이 동의하듯이 인종간 차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구절이다. 흔히 셈은 동양계를, 야벳은 백인을, 함은 아프리카계 흑인의 조상이 되었다는 말에는 아무런 신빙성도 없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축복한 이들 관계들이 저주와 지배, 피지배의 문제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잘못을 드러내고 그것으로 아들을 저주하고 그리고 아들 사이에 서로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는 관계가 될 것을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할 노아의 입에서 나왔다는 이 비극적인 현실, 이것을 우리는 슬퍼해야 한다.

19.  노아의 자손들은 시날 평지에 모여 살며 거기서 탑을 쌓기 시작했다(11:2-4). 이것은 인류의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죄의 발전을 상징한다. 시날은 두 강의 나라라는 뜻으로 후에 바벨론 혹은 갈대아라고 불린 지역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기 위하여 탑을 쌓기 시작했다(11:4). 이것은 인류문명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문명의 탑을 쌓아 올리고 있는가? 바로 자신의 명성과 번영을 위한 것이다. 이기적인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를 위하여 세계를 이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중심의 문화, 인본주의 문화는 필연적으로 죄악의 문화이다. 인간은 이 죄에 빠져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이다. 오늘날 과학기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근대인의 DNA를 전수받아 낙관적 미래를 주장하나 거기에는 죄와 구원의 문제에 대한 어떠한 대답도 없다. 인간은 여전히 죄와 불행의 역사를 무식하게 밀고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은 항상 자신도 알 수 없는 헛된 희망이다. 그러나 성경은 확실한 희망을 말한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받을 때에만 소망이 있다. 구원의 소망은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회복할 때 인간은 참 소망이 있는 존재가 된다.

20.  하나님은 인간들이 하는 일을 보려고 내려오셨다(11:5).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시고 그들을 지면에 흩으셨다(11:6-8). 그러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다”(11:8). 하나님은 우리가 죄의 문화를 쌓기를 중단하고 의의 말씀을 따르기를 원하시는 줄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셈의 족보를 통하여(11:10-26), 그리고 데라를 통하여 아브라함을 통하여(11:27-32) 다시 인류를 구원의 길로 들어서도록 인도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으로부터 새롭게 전개될 믿음의 조상들의 역사는 인간의 죄의 역사의 한 가운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였다고 일괄하여 말할 수 있다.

주소 : (08252) 서울특별시 구로구 고척로21가길 61-5 서울목양교회 TEL : 02-2618-2777
지도를 클릭하시면 더욱 자세히 오시는 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COPYRIGHT(c) 서울목양교회 ALL RIGHT RESERVED. PROVIDED BY 교회사랑넷